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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時한 시절 vol.19
(허연 시인 「오십 미터」)
- 주영헌
오십 미터
-허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오십 미터』 중
(문학과지성사, 2016)
사무치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평생을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뼈에 검게 낙인이 될 정도로 그립지만, 인력(人力)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 거리, 그리고 시간. 시인은 말합니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그러나 그 축복은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시 「첫,」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누군가를 가슴에서 지우는 일은 딱 십 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당신은, 사랑이 그리 쉽게 떠나갔는가.
「첫,」부분
딱 십 년이면, 검은색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가물가물해지는 축복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 년만 지나기를 진심으로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고 보니 십 년으로는 어림도 없더군요. 십 년이라는 시간은 그냥 감내하기 힘든 시간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오십 미터, 그 짧은 거리로 무엇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오십 미터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오십 미터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오십 미터란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물리적인 거리보다 어떤 마음의 거리입니다. 제 시 「첫,」에서 말했던 십 년이라는 시간, 그것이 바로 오십 미터입니다. 멀 다면 먼, 손을 뻗으면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이지만, 내 생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우리의 생은 몇 미터입니까. 당신은 지금까지 몇 미터를 달려온 것입니까. 제가 달려온 거리는 몇 미터입니까. 우리는 몇 번 레인에서 달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몇 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한 생을 어떤 거리라고 할 때, 이때 거리는 하나의 ‘척도(尺度)’입니다. 척도에서의 척(尺)이란 어떤 것을 재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은 자로 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은유일 뿐입니다. 척은 ‘분절성’이 있고, 이 분절성으로 사람의 한 생을 쉽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생을 거리(길이)로 측량한 것입니다. 실제로 거리는 ‘시간’으로 치환해야 합니다. 시간이란 추상적인 것입니다. 하루를 24시간이라고 말하지만, 24시간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정해진 하나의 약속일 뿐입니다. 하루라는 경과를 24시간으로 1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추상(단순)화한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나의 존재를 ‘세계-내-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나라는 존재는 ‘던져진 것’입니다. 이 던져짐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피투(被投)’와 ‘기투(企投)’입니다. 피투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에 던져진 상황을 말합니다. 어떤 준비도 없이 낯선 세계에 던져진 자에게 불안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현상입니다. 불안은 ‘내가 이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때 자각이 발생합니다. 자신의 날모습을 직시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능력을 갖췄는가. 나는 어떻게(현실적으로는 먹고 사는 문제가 될 것이고, 철학적으로는 삶에 대한 통찰이 될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갈 것인가. 이러한 자각을 통해 나는 ‘의지적’으로 세계로 한 발 더 나아가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바로 변곡점이 발생합니다. 피투가 기투로 바뀝니다. 내 순수 주관(主觀)의 의지로 나 자신을 세계에 던져 넣는 것입니다.
피투와 기투는 ‘던져진 것’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어떻게 던져지게 되었는가입니다. 전자는 내 의지가 아닌 누군가, 또는 절대자의 의지에 의한 것입니다. 후자는 순수한 나의 의지, 내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만나는 세계는 평면입니다. 2차원적입니다. 2차원적 지평(地平)의 세계에서 존재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재는 언제나 지평 위에 직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2차원적으로만 존재합니까.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이것은 시간의 역동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은유는 시간은 끝없이 흐르며,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재란 시간의 횡단면, 그 어느 지점에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시간은 끊이지 않고 흐르며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상성(하이데거의 용어입니다)’이라는 단어로 바꿔 부를 수 있습니다. 일상성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우리 존재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항상 현재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존재는 시간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존재의 실존성을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는 근거는 바로 시간성(時間性)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현존재의 존재가 관심으로서 분절된 형태로 구조적 전체성을 지닌다는 것은, 시간성을 바탕으로 생각해야만 비로소 실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중에서
하이데거의 책 『존재와 시간』을 읽는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인내심을 뒤로하고 저는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읽고 있습니다. 단연코 이 책은 제가 가지고 있는 책 중 가장 두꺼운 책 중의 한 권입니다. 물론 이 책보다 두꺼운 책도 있습니다. 〈길〉에서 나온 『헤겔』이나, 〈동서문화사〉의 『정신분석입문』(프로이트) , 『인간 지성론』(존 로크), 『존재와 무』(사르트르) 등도 그러합니다. 한 열 권 정도 500페이지를 거뜬히 넘어가는 이 책은, 사실 첫 장을 넘기기도 무섭습니다. 오십 미터가 아니라 마라톤을 달리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살아온 시간을 ‘측도(測度)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한 오십 미터란 얼마 정도의 거리입니까. 이 또한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 까닭, 사람마다 느끼는 시간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잘 아는 아이의 엄마와 만났습니다. 제가 육아 휴직을 했다고 하니까, 어느 아이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막내 ‘연하’라고 하니까, “연하가 벌써 초등학교 들어갔어요?” 라고 얘기합니다. 자기는 연하가 그렇게 컸는지 예상도 못 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 엄마는 그렇게 느낀 것입니까.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남의 아이는 빨리 큰다고.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어떤 시간을 빨리 지나가고 어떤 시간은 아주 늦게 지나갑니다. 시간을 아주 늦게 보내는 방법을 하나 알려드릴까요. 그것은 바로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는 것입니다. 저처럼 철학책을 읽으면, 지독하게도 시간은 늦게 갑니다.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 겪어본 경험, 바로 군대 생활이 있는데요, 시쳇말로 국방부 시계는 민간인 시계와 다르다고 하죠. 지독하게도 늦습니다.
위에 소개한 시간은 ‘심리적’입니다.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을 상대적으로 빠르게 느리게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심리적이 아닌 물리적으로 다른 시간이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특수상대성법칙의 시간입니다.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주와 지구의 시간이 다르게 흐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젊은 아버지는 자기 어머니만큼 늙은 딸을 만나게 되는데요, 우주라는 전체적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를 넘어, 이런 개념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마술처럼 신기합니다.
시간의 흐름(어디까지나 느낌입니다)은 주체의 의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관심’입니다. 얼마나 주체의 의지가 시간에 (관심에 따른) 관여를 하느냐에 따라 시간의 척도는 달라집니다. 그 척도는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흐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입니다. 기억은 모든 시간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오랜 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살았던 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생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흐르는 강물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생은 허무로 가득 찰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는 암울한(이것은 생의 ‘아포리아’입니다)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 다수는 그런 생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는 몇 미터를 걸어온 것입니까. 그리고 앞으로 몇 미터를 더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이의 총체성 속에서, 우리는 어떤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까. 그 길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으며(할 것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잃었습니까(잃을 것입니까).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안타까운 일들이 그 길들 가운데 벌어진(벌어질) 것은 아닙니까. 때로 우리는 시인의 시 「날짜변경선」처럼 훌쩍 건너가 되돌아오고 싶지 않은 어떤 외계(外界)로 도망쳐버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내 주체로 단단하게 견뎌냅시다. ‘나의 주인은 나’입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앞으로 걸어갑시다. 그 길이 무엇이 있든, 당신은 분명 지나온 길보다 더 잘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2017년 4월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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