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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 히라노 게이치로

monohan 2018. 1. 25. 16:14




- 히라노 게이치로








  마사키는 저도 모르게 노승의 기색을 살폈다. 처음 만났던 날 밤에 느꼈던 그대로, 속진(俗塵)에 물들지 않은 담백함에 후덕한 자애가 담긴, 참으로 대오각성한 이의 얼굴이었다. 노승은 쉽사리 말을 풀지 않았다. 침묵은 묵화에 '그려진' 여백처럼 텅 비었으되 빈틈이 없다. 노승의 심중이 그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만 같았다.

  내면의 생활. ─ 과연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엔유와 마주할 때마다, 마사키는 그런 의문을 품곤 했다. 이제까지 그는 인간의 겉에 드러난 바를 간단히 믿지 않도록 애써왔다. 그것은 허세니 체면이니 하는, 전 시대로부터 이어져온 소위 '미풍(美風)' 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외래(外來)의 인간불신 사상과 엇갈려, 기묘하게 어두운 것으로 변하여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탓이었다. 인간과 접하기 위해서는, 항상 의식을 상대방의 내면으로 향하여 거기에 감춰진 것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되고, 거기에 얽힌 감정의 실을 한 올 한 올 꼼꼼하게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사키에게 있어, 상대방을 신뢰한다는 것은 마침내 그 작업이 끝나고 나서였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복잡하게 얽혀있어도 끝내 풀리지 않는 실이란 없으므로. 그러나 엔유를 마주하면, 이런 평소의 노력이 마음먹은 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노승의 마음속을 향해 들어간 마사키의 의식은 항상 어느 곳에선가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면 다시 밖으로 튕겨져나와 있곤 했다.

  그리고 처음의 침묵만이 남겨져 있다. 그 침묵은 믿을 수 있는가. 아니, 여전히 불안함을 느낀다. 믿어도 좋을 것인가, 의심한다. 언제나 그랬다. 얽히지도 않은 한줄기 실을 찾는 사람처럼, 애당초 있지도 않은 환상의 실을 어떻게든 풀어보려 애쓰는 사람처럼, 마사키는 별 뾰족한 수를 찾아내지 못한 채 노승의 침묵과 대치하곤 했던 것이다.



  마음의 평정을 잃고 대답을 재촉하는 마사키를, 엔유는 건조하고 날카롭게 빛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소승은 처음부터 자비심에서 선비를 구한 것이 아니외다. 한 찰나 '감히' 그냥 지나치려 했던 소승의 교만을 절복(折伏)하기 위해 업어왔을 뿐이오."



  "아아, 괴로워요. 지금처럼 제 몸을 저주한 적은 없었어요. 당신을 이곳에 불러들이고 만 것이 너무도 괴로워요. 제 마음의 반은 제 것, 나머지는 무언지 정체도 모를 무서운 힘의 것, 누군가를 생각하면 만나고 싶어지지요.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부르고 말아요. 제 마음이 원하는 것을 무리하게 이루어버리고 말아요."

  "내 꿈에 보이던,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그 자태로."

  "하지만 꿈을 꾸는 당신도 제가 꾼 꿈일 뿐…… 제게는 꿈도 현실도 같은 것,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답니다. 아아, 그러니 부디, 부디 돌아가주세요."

  "아니, 그렇다면 더욱더, 나 또한 꿈에서 당신과 만난 것이오. 나 또한 꿈도 현실도 똑같은 것."

  "아니오, 당신은 나와는 다릅니다. 당신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비로소 죽을 수 있는 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야만 '죽음을 죽음으로 이어갈' 분."

  "무슨 소릴! 상관없소, 그렇다면 나는 인간의 역사가 다 퍼올리지 못한 한 방울 밤이슬이 되리다."

  "안 됩니다."

  "나의 죽음은 이 땅이 알아주리다, 저 달이 알아주리다, 그리고 당신이 !"

  "아아!"

  "그렇지, 내 목숨은 큰 바다의 파도가 밀어올린 물거품이 내쏘는 단 한순간의 반짝임이오, 거목에 무성한 잎사귀 한 잎에서 반짝인 찰나의 명멸이오. 언젠가 잃을 것이라면, 지금 이곳에서, 당신 앞에서! 더이상 생각할 것 없소, 당신이 나에 대한 추억을 생각할 때, 꿈꿀 때, 왜 내가 소생하지 못하겠소! 죽은 달이 다시 빛나기 시작하듯, 그때마다 나는 소생하오. 참되게 다시 태어나오."

  "안 됩니다! 산을 내려가시면 다시 몇 번인가 마음 저릴 만남도 기다리고 있을 터."

  "내려가면이라구요?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일 따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소? 내일을 기약하고 이 한순간을 버리라는 거요?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소."

  마사키의 말투는 거세어갔다.

  "내 사랑은, 제발 들어주시오. 내 사랑은 단 한 번 휘두른 검이오. 달군 불길이 그대로 남은, 거세게 달구어져 번쩍번쩍 빛나는 붉은 검이오. 그러나 이전에는 아름답게 장식된 칼집 속의 검이었을 뿐이오. 뽑아서 휘두르면 사람도 단번에 베엇을 것이오. 그러나 헛되이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검이라면 반드시 그 속에 죽음을 감추고 있을 터, 일격에 죽일 죽음을! 칼집의 매듭은 그저 한번 풀면 족하오, 베지 못한 검이라면 그저 그것으로 끝일뿐! 지금 나는 그 검을 뽑았소, 당신 앞에 뽑아보인 것이오. 칼집은 일찌감치 내던졌소, 다시 집어넣을 수는 없어요! 당신은 그저, 그 칼자루를 쥐고 내 가슴팍에 서기만 하면 되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담아 찌르면 되오! 깊게, 깊게, 저 먼 곳으로 뚫고 나갈 만큼!"

  다카코는 흐느껴 울었다. 말[言語]은 마사키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나가 될수록 진실하고, 하나가 될수록 허무했다. 말은 스스로 찢어지고, 가루로 부서지고, 쉽게도 초월되었다.



  "아아, 이제 망설임은 없어요.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하는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오래도록, 아아, 그렇지요, 단 한순간도 잊은 일 없이, 얼마나 깊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허망하게! ─ 처음부터 이루어질리 없노라 체념했던 내 사랑, 그것이 지금, 이 무슨 기적인가요, 이루어지려 하네요, 당신은 목숨을 걸고 저를 사랑해주시네요!"




  히라노 게이치로, 허들이 높다.


  이 시대재현가의 소설에는 필연적으로 그 시기를 정교하게 직조해내기 위한 지루한 전주가 수반된다. 그 당시 시대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보통의 현대인은 회가 동하기 어려운 사건, 시대정신이 극 초반에 그리 친절하지도 않은 한문체로 나열되어 있다. 독자로서 소설 속 화자와 감정적 동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개 부분에서 꽤나 부단한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짧게 말해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전개다. 한국사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19세기 일본의 폐불회석 정서를 공감하기 위해 집중력을 올리고 있는 모습은 어떻게 봐도 넌센스 아닌가. 잘도 이런 걸 읽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싶다. 현학취미에 바람이 한참 들었을 때니 가능했지. 정말 문자면 뭐든 괜찮았었구나.


  불도에 정진하는 노승의 태도. 한 찰나 인간적인 심리의 발현을 외면하지 않고 바로 잡으려는 모습에 경도되다가 멈칫. 지나치게 높은 선, 스스로 깔려죽을 만한 도덕을 머리에 얹고 버거이 사는 게 바람직할까. 나는 성인이 아니다. 환상을 걷어내고 이웃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인간답게 삶을 꾸려나가는 쪽이 더 행복에 가까워지는 방법이려니. 짐을 내려놓읍시다.


  정열의 현현을 꿈꾸는 부나방 같은 젊은 시인의 이야기. 인간의 역사가 다 퍼올리지 못한 한 방울 밤이슬. 큰 바다의 파도가 밀어올린 물거품이 내쏘는 단 한순간의 반짝임. 거목이 무성한 잎사귀 한 잎에서 반짝인 찰나의 명멸. 죽은 달이 다시 빛나기 시작하듯, 그런 당신이 아름다운 건 이어졌을 때 이야기. 값 없는 정열만큼 안쓰러워 뵈는 것도 없지.. 서른 줄에 다시 돌아보니 소설 전반의 내용보다 인물 소개 각주에 써있는 모리 오가이의 신랄한 비판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그가 정치가로도 사업가로도 자립하지 못한 것은 로맨틱에 지나치게 경도된 탓이 아닌가.




이 포스트는 비영리적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나 저작권 문제가 있을 시 연락 주시면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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